고고역사실

한양대학교박물관을 소개합니다.
삼국·통일신라시대

삼국시대는 부족국가로 출발한 고구려, 백제, 신라가 원시적 국가체제에서 벗어나 자체적으로 고대국가의 틀을 확립한 시기 입니다. 삼국은 각각 성장과정에서 받아들이기 시작한 철기문화를 소화하여 철제 농기구를 일반화시키고 정치제도를 정비하였습니다. 또한 불교가 전래 확산되어 유교와 더불어 후대 정신문화의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대륙문화를 흡수, 재창조하였습니다. 한편, 고구려와 백제의 문화를 통합한 통일신라는 대동강에서 원산만 이남지역을 차지하고 하나의 민족국가를 이루게 됩니다. 민족문화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도성의 면모를 갖추면서 서남아시아를 비롯하여 중국의 당, 일본 등과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국제도시로 성장하였습니다.


대표유물

대표유적01
대표유적02
대표유적03
대표유적04
대표유적05
대표유적06

하남 이성산성 유적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이성산에 있는 포곡식(包谷式)의 석축산성이다. 이 산성은 한강에 접하고 있는 여러 성들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인 중요성과 성내에서 발견되는 삼국시대 유물 등으로 인해 중요시되고 있다. 발굴조사의 성과를 살펴보면 장방형 건물지 4기, 9각 건물지 2기, 8각 건물지 1기 등의 건물지와 2곳의 저수지, 신앙유적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고, 목간(木簡), 자(尺), 목제인물상, 철제농기구, 무기, 벼루를 비롯한 토제품, 토기와 기와 등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하남이성산성유적01
하남이성산성유적02
하남이성산성유적03
하남이성산성유적04
하남이성산성유적05
하남이성산성유적06

상세보기


목간
시대 : 삼국~통일신라시대 / 크기 : 길이-15㎝ 목간

문서나 편지 등의 글을 일정한 모양으로 깎아 만든 나무에 새겨 넣은 것이다. 한국에서 출토된 목간의 사용 시기는 늦어도 6세기 중엽에서 8세기 중엽에 이르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주로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 또는 널리 쓰이기 이전 그에 대신하는 용도로 널리 쓰였다. 목간은 비록 단편적이긴 하지만 당대의 정치, 사회상이 기록되어 있긴 때문에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목간
(왼쪽부터 순서대로)
목간
크기 : 길이-18.5㎝
원통형(圓筒形)으로 깎은 나무토막에 묵서(墨書)되어 있으며 상단(上段)은 결실(缺失)된 상태이다. 묵서(墨書)는 7자 정도 쓰여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내용은 파악할 수 없다.

목간
크기 : 너비-2㎝
양쪽면을 편평하게 다듬고 묵서한 것으로 보인다.

목간
크기 : 너비-2㎝
양쪽면을 편평하게 다듬고 묵서한 것으로 보인다.

목간
크기 : 길이-33.4 ㎝
나무판자를 좁고 길쭉하게 다듬은 후 양단(兩端)의 양쪽에 V자 형의 홈을 파서 끈으로 묶을 수 있도록 하였다.

목간
크기 : 너비-2㎝
양쪽면을 판판하게 다듬고 묵서한 것으로 보인다.

목간
크기 : 길이-6.4㎝
단경호(短頸壺) 안에서 출토된 것으로 총 5개가 발견되었는데 그 중 하나이다. 한쪽 단면(斷面)에 줄로 묶을 수 있는 ‘V’자형의 홈이 파여져 있다.

목간
크기 : 길이-5.1㎝
전면에 묵서가 몇 자 쓰여 있으나 판독이 불가능하다.

목간
크기 : 길이-7.1㎝
단경호(短頸壺) 안에서 출토된 것으로 총 5개가 발견되었는데 그 중 하나이다. 한쪽 단면(斷面)에 줄로 묶을 수 있는 ‘V’자형의 홈이 파여져 있다. 묵서(墨書)가 있던 흔적은 있으나 해독(解讀)은 불가능하고 1개는 파손(破損)으로 결실(缺失)된 상태이다.

목간
크기 : 길이-6.3㎝
단경호(短頸壺) 안에서 출토된 것으로 총 5개가 발견되었는데 그 중 하나이다. 한쪽 단면(斷面)에 줄로 묶을 수 있는 ‘V’자형의 홈이 파여져 있다. 묵서(墨書)가 있던 흔적은 있으나 해독(解讀)은 불가능하고 1개는 파손(破損)으로 결실(缺失)된 상태이다.

목간
크기 : 길이-8.2㎝
단경호(短頸壺) 안에서 출토된 것으로 총 5개가 발견되었는데 그 중 하나이다. 한쪽 단면(斷面)에 줄로 묶을 수 있는 ‘V’자형의 홈이 파여져 있다. 묵서(墨書)가 있던 흔적은 있으나 해독(解讀)은 불가능하고, 1개는 파손(破損)으로 결실(缺失)된 상태이다.
목간
목제인물상
시대 : 삼국~통일신라시대 목제인물상

입상(立像)으로 비교적 완형(完形)에 가까우나 다리의 일부가 잘라진 상태이고 팔을 만들어 끼웠던 것으로 보이는 흠만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길쭉한 모습이 며 머리는 불상(佛像)처럼 15°정도 앞으로 숙였고 몸에는 옷과 목걸이 장식을 표현하고 있다. 색깔은 짙은 갈색을 띠고 있으며 나무결로 보아 굵은 통나무의 일부로 조각하여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목제방망이(통일신라)
시대 : 삼국~통일신라시대
(좌) 목제방망이
크기 : 길이-31.4㎝
통나무를 깎아서 만든 것으로 방망이 부분은 직경 10.4㎝, 길이 16.5㎝이고 손잡이부분은 직경 4.3㎝, 길이 13.8㎝로 전체 길이는 31.3㎝이다. 방망이부분은 사용에 의하여 많이 마모(磨耗)되었고 재질(材質)은 참나무이다. 짚신 삼는 도구의 하나로 짚 등을 두드려 다듬는데 쓰인 후대의 신골방망이와 같은 형태이다.

(우) 목제방망이
크기 : 길이-56.7㎝
몸통의 윗부분에서 아래 부분으로 갈수록 두꺼워지는 형태이다. 전체모양은 근대에까지 쓰였던 디딜방아의 공이와 비슷한데, 아마도 디딜방아와 같은 용도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완형(完形)으로 복원(復原)된 시루와 함께 수습되었다.
 목제방망이(통일신라)
쇠스랑 철도끼 (통일신라)
시대 : 삼국~통일신라시대
(좌) 구멍뚫린 철도끼
크기 :가로-15.5㎝ 세로-7.7㎝ 높이-3.9㎝
도끼는 철제연모의 하나로 공구로서의 의미가 크지만, 당시에는 무기로서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도끼에는 주조쇠도끼(鑄造鐵斧)와 단조쇠도끼(鍛造鐵斧)로 나누어진다. 한국에서 처음 발견되는 쇠도끼는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와 관련이 있는 주조쇠도끼이다. 주조쇠도끼는 주형(鑄型)을 이용해 제작되는 것으로 청동기유물과 함께 발견되었다.
약간의 부식(腐蝕)만 있을 뿐 상태가 양호하며 자루부분은 단면(斷面)이 장방형(長方形)으로 잘 다듬어져 있다. 무게는 913g이고 자루의 구멍은 5.2× 3.86㎝이다.

(중) 구멍뚫린 철도끼
크기 : 가로-15㎝ 세로-7.3㎝ 높이-3.2㎝
날 부분이 약간 부식(腐蝕)되었으며 자루구멍에 원래의 나무자루 조각이 남아있다. 무게는 720g이고 자루의 구멍은 4.2× 3.2㎝이다.

(우) 철도끼
크기 : 가로-15㎝ 세로-5.7㎝ 높이-2.9㎝
날 부분은 예리하게 남아있고 자루부분은 암석이 부식된 채 붙어 있다. 무게는 1277g이고 자루의 구멍은 3.3× 1.6㎝이다.

(앞) 쇠스랑
크기 : 길이-12.9㎝ 너비-14.6㎝ 높이-7.3㎝
쇠스랑 철도끼 (통일신라)

세 개의 발이 하나의 자루에 연결되는 형태로 흙을 부수고 고르는 농기구로 사용되었다. 이전 철기시대에도 나무로 만든 쇠스랑형 괭이가 있었는데 이것이 철기화(鐵器化)된 것이다. ‘U’자형 삽날과 쇠스랑은 가벼우면서도 흙에 대한 저항력(抵抗力)이 낮고 강인하기 때문에 밭작업 뿐만 아니라 논농사에서 작업 효율을 크게 높일 수 있었다. 병부의 지름은 3.8㎝이고 세 개의 날이 모두 잘 남아 있다.

요고
시대 : 삼국~통일신라시대 / 크기 : 길이 : 42㎝, 구멍지름 : 16㎝ 요고

이 유물이 처음 저수지에서 출토하였을 때는 이 유물의 성격을 알지 못하였고, 나중에 문헌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고구려에서 사용하던 장고의 일종이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한쪽 일부가 파손되기는 하였으나 전체적인 보존 상태는 매우 양호한 편이다. 겉 표면은 칼로 다듬어서 마무리하였으며, 내부는 끌 같은 것으로 파고 칼로 다시 다듬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퇴적층에 묻히는 과정에서 흙과 자갈 등으로 인해 원통형(圓筒形) 양측 면이 눌리게 되어 복원된 두 지름의 규격에 다소 차이가 있다.

하남이성산성유적
하남이성산성유적
하남이성산성유적
하남이성산성유적
하남이성산성유적
하남이성산성유적